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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금만 챙기고 실제창업 "NO"…물 흐리는 벤처지망생들

이승훈,김동은,우제윤,문지웅,박창영,강영운 기자
입력 : 
2016-12-27 17:48:09
수정 : 
2016-12-27 2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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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만 능숙한 하이에나 천국…정직한 벤처인들은 대접 못받아
◆ 기업이 미래다 ① / 네이버·휴맥스 키웠던 벤처정신 실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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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한 B씨는 안정된 직장을 보장해준다는 유혹을 뿌리치고 마음맞는 친구들과 PC용 영상처리보드를 만드는 회사를 창업했다. 회사에 야전침대를 놓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개발한 기술은 당시 노래방 붐을 타고 영상에 노래 자막을 입혀주는 핵심 기술로 빅히트를 쳤다. 자신의 기술에 자만하지 않고 영역을 조금씩 넓혀갔던 B씨는 현재 디지털 셋톱박스로 연매출 1조5000억원의 중견기업인이 됐다. 변대규 휴맥스 회장이다. # 2000년 7월. 인터넷 포털 네이버를 이끌던 L씨와 온라인 게임업체 한게임으로 큰 성공을 거둔 K씨는 회사를 합쳤다. 하루 평균 2400만명이 찾는 NHN의 탄생이다. 대한민국 굴지의 포털로 부상한 NHN의 성공에 자만하지 않고 L씨는 2011년 일본에서 '라인'이라는 메신저를 출시해 일본을 포함한 동남아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한다. 상장을 통해 억만장자의 반열에 올랐지만 L씨는 내년부터 NHN의 공식 직함을 모두 떨쳐버리고 유럽시장에 새롭게 도전할 각오를 밝혔다. 합병 이후 NHN을 떠난 K씨도 과거의 영광을 잊고 카카오를 설립해 국내 메신저 시장을 평정하고 2대 포털이던 다음까지 인수했다. L씨는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 K씨는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수많은 인재가 열정과 아이디어만 손에 들고 창업 벤처시장으로 몰려들었다. 성공을 거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했고 여려 형태의 부정사례도 있었지만, 경제는 역동적으로 움직였고 많은 젊은이들이 희망을 갖고 살았다. 소위 '대박'을 친 사람도 자만하지 않고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당시 벤처기업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업체는 끊임없이 자기혁신을 추구해 온 곳이 대부분이다.

반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도전정신과 절박함을 찾아보기 어렵다. '염불'보다 '잿밥'에만 관심 있는 경우도 많다.

벤처캐피털 대표 K씨는 사물인터넷(IoT) 관련 하드웨어를 개발하겠다며 창업한 스타트업에 대해 들려줬다. K씨가 그 업체를 알게 된 것은 창업 초기인 3년 전이다. 벤처업계에서는 보기 드문 '제조업' 기반 스타트업이란 점이 신선했다. 스타트업 대표가 직접 찾아와 진행한 프레젠테이션도 최고 수준이었다. 투자를 망설일 이유가 없어 보였다. 스타트업 지원 사업마다 적극적으로 참여해 10개가 넘는 정부 관련 기관에서 지원금을 따냈다. 한 심사위원이 "저 기업한테는 지원금 그만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해당 기업은 아직도 프레젠테이션에 들고 다니는 시제품 1개 외에 상용제품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창업 당시 있었던 직원의 절반 이상이 회사를 떠났다. K씨는 "지원금에만 집착하다 보니 창업 초기의 열정은 사라지고 '좀비화'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창업 관련 경진대회도 변질되는 분위기다. 창업보다는 상금에 더 큰 관심을 갖거나 대기업 취업을 위한 이력을 만들기 위해 경진대회에 참가하는 일도 많다는 것이다.

한 공공기관이 최근 실시한 정보활용 애플리케이션 경진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벤처 업계 임원 J씨는 "20여 개 업체가 대회에 참여했는데 솔직히 누구도 쓸 만한 아이디어를 제출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이미 정해진 예산을 집행해야 했기 때문에 대충 몇 개 업체를 선정해 시상했다"고 털어놨다.

최근에는 '창업 사기꾼' 사례까지 나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10월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5년형을 확정받은 박홍석 모뉴엘 대표다. 모뉴엘은 저가의 홈시어터 컴퓨터를 고급 제품인 것처럼 가격을 부풀려 수출하고, 이를 통해 수출대금 채권을 마련해 3조4000억여 원을 사기 대출받았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사례는 우리나라 스타트업 시장을 심각하게 왜곡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창업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젊은이들을 위한 자금을 실질적인 창업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빼앗아 가는 결과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면 창업 성공률은 떨어지게 되고, 창업을 꿈꾸던 젊은이들마저 '창업은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해 이를 꺼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올해 초 창업지원 경진대회에 참여했다 탈락한 경험이 있는 벤처 기업 대표 안 모씨(36)는 "경진대회는 최신 유행 아이템을 하겠다는 지원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러한 평가 시스템에 맞춤형으로 자료를 제출하는 업체만 계속 지원금을 받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기획취재팀 = 이승훈 차장(팀장) / 김동은 기자 / 우제윤 기자 / 문지웅 기자 / 박창영 기자 / 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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