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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_창업을_응원해] <13> 연봉 2억 잘 나가는 로펌 그만 두고 창업 시장 뛰어든 사연

박효연 헬프미 대표





어린 시절 경찰인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시골에서 자랐다. 서울로 올라왔을 땐 경상도 사투리가 심하다고 친구들에게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산과 들에서 맘껏 뛰어 놀았던 장면은 오래도록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공부에 매진했다. 머리가 좋아서인지, 어릴 적부터 독서를 많이 했던 덕인지 전교 상위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행정고시 출신으로 고위 경찰관을 지냈던 아버지의 희망대로 법대 진학을 목표로 삼았다. 문과를 선택했지만 국어보다는 수학이 좋았다고 한다. 논리적으로 사고만 하면 정답이 딱 떨어지는 수학과 달리 국어는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과 많이 달라 오답이 많이 나오는 일이 많았던 것. 나중에는 아예 패턴을 외워서 시험을 치렀다. 왜 정답일까 하는 생각에 납득은 되지 않았지만 우선 성적부터 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고, 사법연수원을 거쳐 대형 로펌에 들어갔다. 로펌에서 2억원에 가까운 연봉을 받고 남부러울 것 없이 지냈지만 법률 정보의 불균형에 의구심을 가지다가 결국 사표를 던졌다. 누구에게나 접근이 용이한 법률 서비스를 목표로 스타트업을 설립했고, 창업 2년차인 올해 6개월 이내 월 매출 1억원 달성이 목표다. 자신의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박효연(35·사진) 헬프미 대표의 현재진행형 스토리다.

자연과 함께 호흡했던 어린 시절



부산에서 태어났다. 3살에 서울로 이사를 와서 살다가 7살 때 경북 고령으로 내려갔다. 경찰공무원 출신인 부친이 경찰서장으로 발령 받았기 때문. 고령의 관사에 지낼 때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넓은 마당에는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마당 한 구석에선 토끼도 키웠다. 아름드리 꽃과 나무가 마당을 감쌌고, 볕이 좋은 날엔 평상에 올라가 소꿉놀이도 하고, 책도 읽었다. 동네 언니오빠들과 산이며 들로 놀러 다녔고, 해가 질 때쯤 온 몸에 흙을 잔뜩 묻히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법대 커플이다. 공무원을 선택한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법학과 석사 학위까지 받으며 전임 강사로 학문에 매진했다. 박 대표보다 4살 아래 여동생을 낳은 후 애들을 맡길 데가 없어 일을 그만 두게 됐다고 한다. 부모가 못 이룬 꿈인 ‘법관’이 어린 딸에겐 간절한 꿈이 됐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자신에게 미래의 선택은 법관 외에는 없다고 굳게 믿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계곡에 놀라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박효연 대표. /사진제공=박효연 대표


아버지가 고령에서 영주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영주에서 살았던 9살 때까지가 그녀의 시골 살이의 전부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고, 이후로는 마당이 없는 도시의 아파트에서 줄곧 살았다.

“영주에서 서울로 전학 왔는데, 경상북도 사투리 때문에 반 친구들한테 놀림을 많이 받았어요. 처음에는 넓은 마당에서 자유롭게 놀았던 시골 생활이 그리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 생활에 익숙해졌네요. 제가 적응을 꽤 잘하는 편이거든요.”

어릴 적부터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는 책이었다. 집에 있는 책은 물론 친척집에 가도 가장 먼저 이 집에 어떤 책이 있는지부터 살폈다고 한다. 자신이 못 읽은 책이 눈에 띄면 곧바로 집어 들고 그 집에 머문 몇 시간 동안 다 읽었다. 미처 읽지 못해 집에 안 가려고 하면 어머니는 나중에 책을 사 주겠다고 약속하곤 했다. 하지만 그 약속이 지켜진 적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를 따라 읍내를 나가 장 보는 일도 즐거운 추억 중 하나다. 그녀에게 뭘 갖고 싶으냐고 물으면 무조건 동네 서점에 가서 읽고 싶었던 책을 골랐고, 여동생은 옷을 사달라고 졸랐다. 어릴 적부터 미적 감각이 남달랐던 그녀의 여동생은 지금 건축설계사로 일하고 있다.

경찰 제복을 입은 아버지와 함께 박효연 자매가 가족 사진을 찍고 있다./사진제공=박효연 대표


독서에 너무 빠진 탓에 시력도 나빠졌다. 7살에는 책장 맨 위의 책 제목이 흐릿하니 잘 보이지 않아 쩔쩔매자 어머니는 당장 안과를 데리고 갔다. 그때 안경을 처음 쓰게 됐다고 한다. 키도 또래보다 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키가 160㎝를 넘었고, 사투리 때문에 놀리던 친구들도 그녀의 큰 덩치에 겁이 나서인지 더 이상 놀리지 않았다.

우등생 비결은 탁월한 독서량



공부는 잘 했지만 외고나 과학고 등 특목고를 선택하진 않았다. 당시엔 내신이 안 좋은 특목고보다는 일반고에 진학해 명문대 들어가는 분위기가 강했다고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법관이 목표였고, 자연스럽게 공부에 매진했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높았지만 학원 등 사교육에 열성은 아니었다. 자식들이 알아서 공부하길 바랬고, 노력한 만큼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중학교 다닐 때는 전교 10등 내외였던 박 대표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전교 1, 2등을 오갔다고 한다. 그 비결로 수학 실력과 남다른 독서량을 꼽았다.

“논리적으로 사고하면 정답이 뚝 떨어지는 수학이라는 과목이 제 적성에는 무척 맞았던 것 같아요. 중학교 다닐 때 수학학원에 다니면서 수학경시대회도 준비했는데, 그때 다양한 문제를 접하면서 자신감도 붙었구요. 고등학교 가서는 수학 때문에 골치 아팠던 적은 없으니 수학 실력은 안정적으로 유지됐던 것 같네요. 하지만 항상 국어가 문제였어요. 특히 시나 소설 등 문학이 힘들었던데 제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답을 적으면 무조건 틀리는 거에요. 제 생각하는 방식이 일반인의 상식과 다른지 모르겠지만 언어 영역에서 자꾸 오답을 내니까 나중에는 아예 시험의 패턴을 외워서 그대로 풀었어요. 처음에는 국어 선생님한테 왜 정답인지 따지기도 했지만 제 생각이 출제자의 의도와 다를 수 있다는 결론을 낸 후엔 굳이 내 생각을 고집할 게 아니라 출제 유형이란 시스템에 저를 맞추기로 한 거지요.”

하지만 순순히 공부만 잘 하는 모범생 스타일은 아니었나 보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야간자율학습을 거부하고 집에 일찍 오기도 했고, 좋고 싫은 것에 대한 의사 표현도 명확했다고 한다.

서울대 법대 01학번으로 입학했다. 그것도 정원 외 10%만 뽑는 수시모집으로 서울대 문턱을 가뿐히 넘었다.

논술시험과 면접으로 당락이 결정됐던 수시모집에서 어떻게 합격할 수 있었는지 묻자 잠시 생각에 잠기던 박 대표는 면접을 잘 본 것 같다고 답했다.

“입학지원서에 감명 깊게 읽은 책 제목을 적어 넣는 항목이 있었어요. ‘반지전쟁’(‘반지의 제왕’과 같은 것으로 공식 라이선스를 받지 않은 원제)이라고 썼는데, 면접 보시는 교수님들이 그 이유를 물었던 것 같아요. 보통 법대를 지원하면 동서양 고전이나 법과 관련한 책에 대해 쓰기 마련이니까요. 저는 그 책을 통해 시공간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영화나 동영상을 보는 것보다 더 많은 상상력이 작동할 여지가 많았던 게 매력적이었다고 답했죠. 그 답변을 들은 면접 담당 교수님들이 한바탕 웃으셨거든요. 그게 좋은 인상을 남겼는지 결과적으로는 합격하게 된 셈이죠.”

서울대 법대, 해외 연수, 그리고 로펌 인턴



그토록 고대하던 서울대 법대생이 됐다. 처음에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세상에 너무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에 다소 위축되기도 했다. 하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수재들을 모아 놓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만나면서 대학 1년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

“서울대 법대 입학을 목표로 12년을 살았고, 대학 1학년 때는 보다 마음에 여유를 갖고 나 자신을 살펴봤습니다. 저를 관찰해 보니까 새로운 만들고 뭔가를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데 관심이 많은데, 법학은 그런 쪽은 아니었던 것 같았지요. 그래서 법관이 되는 건 포기하겠다고 결심하고 부모님께 사법시험을 치르지 않겠다고 선언했지요. 부모님은 저의 고집을 익히 알고 계셔서 별다른 말을 안 하셨습니다. 대신 제가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싶다고 하니까 그건 허락해 주셨지요. 아마도 바람 쐬고 오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하긴 것 같아요.”

2학년 1학기를 마친 박 대표는 영국 맨체스터를 선택했다. 외국인이 수강할 수 있는 6개월 예비대학과정이 유미스트 대학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등록했다. 당장 머물 숙소로 기숙사를 1주일치만 신청하고 영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 정도 기간이면 현지 탐색을 충분히 마치고 자신이 원하는 숙소를 구할 것으로 기대했다.

영국 연수 시절 싱가폴, 홍콩 친구들과 파티에 한복을 입고 참석하고 있는 박효연(오른쪽 두번째) 대표의 모습.


“영국 친구들을 사귀면서 또래 젊은이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지 직접 목격하게 된 것 같습니다. 영국에서 1년쯤 지나니까 영국 친구들이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는 거에요. 영국 대학은 3년제거든요. 직장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는 그 친구들을 보니까 나도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한국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로펌에서 인턴 생활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인턴을 하다 보면 스스로 법조계로 나갈 만한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테니 테스트 기간으로 삼아보라고 권했던 것이다. 스스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었던 박 대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인턴 생활을 했다. 로펌의 일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번역이나 서류 처리 등 간단한 업무를 맡았던 만큼 할 만 했고, 인턴 특성상 6시 정시 퇴근도 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변호사 일이 할 만하다는 생각을 했고, 하고 싶어졌다.



4학년 1학기부터 사법 시험을 본격 준비했다. 신림동 고시촌에서 지낸 지 2년 3개월 만에 사시 48회로 합격했다. 남들은 다 어렵다는 사시 준비, 그녀에게는 어땠을까?

“법이라는 학문이 국어보다는 수학과 비슷한 면이 많은 것 같아요.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은 그에 대한 학설이 풍부하다는 것도 매력적이구요. 학설 중에는 다수설과 소수설이 있으니 그에 따라 해석을 할 수 있구요. 논리적으로 사고하면서 접근하면 되니까 시험을 준비하는 건 제 적성과 맞긴 했는데, 저도 평범한 사람인지라 공부하는 건 힘들 긴 했죠. 자취방에서 지내면서 평균 6시간 정도 자면서 공부했고, 시험을 앞두고는 2~3시간만 자면서 공부에 파고들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합격하고는 너무 지쳐서 부모님께 사법연수원은 한 해 늦게 들어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지요. 고대하던 합격 소식이니 부모님도 흔쾌히 허락하셨구요.”

박효연(왼쪽 첫번째) 대표가 연수원 동기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쉬면서 뭘 할까 고민하던 박 대표는 아버지의 지인으로부터 중국어를 배워두면 좋다는 조언을 들었다. 어차피 배울 거면 한국에서 어학원에 다니는 것보다는 중국 현지로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마침 영국에서 사귄 친구가 시티은행 상하이 지점으로 오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상하이를 목적지로 정했다. 상하이교통대학 부설 어학원에 등록하고 2주 정도 머물 수 있는 호텔을 예약하고 떠났다. 영국으로 홀연히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숙소든 뭐든 직접 가서 부딪혀보자는 생각이었다. 상하이에서의 생활은 꽤 즐거웠다. 영국에서 인연을 맺은 중국인 친구를 통해 또 다른 중국인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들의 저녁 모임에 종종 함께 했고, 한류 태동기로 한국에 호의적인 분위기였던 만큼 환영 받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6개월 지나자 직업 없이 지내는 자기 자신이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졌다. 또래 친구들은 회사에 다니면서 치열하게 일을 하고 있는데 자신만 놀고 있는 것 같았다. 검사나 판사는 싫고 변호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진로를 정한 후 곧바로 돌아왔고. 연수원 39기로 들어갔다.

부동산과 금융 분야 전문 변호사가 되다



연수원 생활을 마친 후 법무법인 율촌에 들어갔다. 부동산과 금융 분야에서 일을 가장 많이 했고 전문변호사자격도 두 분야에서 받았다. 특히 고위험 파생금융상품인 ‘키코(KIKO)’ 사건이 터졌을 땐 은행권에서 들어온 소송을 많이 맡았다고 한다.

“파생금융상품 소송 건은 금액도 크고 (은행간) 이해관계도 첨예하게 엇갈리기 때문에 양측 모두 대형 로펌이 붙었어요. 금융 분야 소송은 상품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논리적인 해석이 가능해야 하는데 제가 수학적인 사고를 좋아한 게 금융 파트로 전문화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더라구요.”

율촌에서 전문 변호사로 5년간 일하면서 결혼도 하고 능력도 인정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허전했다. 그리고 그 허전함은 연수원 2년차 검찰시보 시절의 기억 한 조각이 발단이 됐다.

사법연수원 2년차가 되면 변호사 2개월, 판사 2개월, 검사 2개월의 실무 수습 기간을 거친다. 박 대표는 2009년 1월 동부지검 검찰시보로 일하게 됐다. 한 번은 1,000만원 정도 사기를 당한 아주머니가 검찰을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했다. 경미한 사건이었던 만큼 검사 선배가 박 대표에게 전후 사정을 들어보고 판단해 보라고 미션을 줬다.

“사기 당한 액수가 너무 애매하게 적었던 거에요. 사기가 100% 인정되더라도 구속까지는 안 되거든요. 1억원이 넘어도 집행유예도 아닌 벌금형에 그치는 편이니까요. 하지만 아주머니는 너무 억울하신 거에요. 사기를 친 상대방은 어차피 구속이 안 된다며 오히려 아주머니를 조롱했고, 그걸로 벌을 줄 수도 없으니 억장이 무너진 거죠. 법률구조공단에 갔는데, 변호사가 아닌 비전문가가 상담하는 만큼 속 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고, 변호사를 알아보려고 해도 상담 비용이 비싼 데다 직접 변호사를 만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거죠. 이 아주머니처럼 사법 피해자가 적지 않은데 법률 지식이 적으니 피해를 입는 일이 많고 이를 해결하려고 해도 비용이 만만치 않은 법률 서비스 시장의 불균형 구조가 제 눈에 보였던 거에요. 이걸 어떻게 해결할 수 없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내내 남았던 것 같습니다.”

율촌에서 일할 때도 대부분이 기업 고객이었던 지라 형편이 좋지 않은 개인들은 충분히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키코 사건에서 승소율이 높은 변호사로 입소문이 나자 중소기업인 한 명이 찾아온 것. 내용을 살펴보니 충분히 싸워볼 만 하다고 판단이 됐지만 결정적으로 소멸시효가 지난 것이다. 그렇듯 안타까운 상황을 종종 맞닥뜨리다가 변호사 생활 6년 만인 2015년 6월 사표를 냈다. 더 지체하면 그대로 안주할 것 같았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고 싶었다.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는데 법률 서비스 시장만은 정보화 혁명에서 비껴나 있는 것 같았어요. 언젠가는 그 한가운데서 변화를 요구 받을 테고, 그 전에 누군가가 그 시장을 열어갈 텐데 그 누군가가 제가 됐으면 하는 열망이 생겼던 거죠. 당시 미국 유학 기회도 있었는데 다녀오면 무조건 2년 동안 근무해야 했거든요. 누가 봐도 좋은 기회였지만, 발목 잡히지 않으려면 그만둬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율촌을 나와 창업 시장에 뛰어들다



율촌을 나오자마자 함께 창업에 나설 동료를 찾기 시작했다. 연수원 같은 반 동기로 가장 친했던 남기룡 변호사는 이미 개인 로펌을 차려서 사업을 하고 있던 터라 합류가 가능했다. 남 변호사의 소개로 현재 헬프미의 이사인 이상민 변호사를 소개 받았다. 이 변호사 역시 대형 로펌에서 근무했지만 적성이 맞지 않아 다른 진로를 알아보던 중이라고 했다.

박효연(왼쪽) 대표가 창업에 함께 뛰어든 남기룡(오른쪽) 변호사와 이상민 변호사와 함께 활짝 웃고 있다. /사진제공=헬프미


“저희 셋의 공통점이라면 체제순응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들 반골 기질도 강하고 하고 싶으면 밀어 붙이는 아집도 있구요. 창업 동지로 이만한 친구들은 없죠.”

사명은 ‘헬프미’라고 정했다. 세상을 도와 장벽을 없앤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박 대표는 “법률 분야에서 정보 혁명을 일으켜 법률 서비스 시장의 가장 큰 문제인 정보 불균형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창업 초기에는 변호사를 쉽게 만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각 분야별로 평판이 좋은 변호사를 선별해 상담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든 것이다. 비용도 12만~18만원(시간당 상담 기준)으로 책정했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100만원을 호가하고, 8년차 변호사만 해도 44만원의 시장가가 형성된 것과 비교하면 가격대를 확 낮춘 것이다.

그 다음엔 정보기술(IT)의 편의성을 접목함으로써 시장 가격을 낮출 수 있는 분야를 찾아봤다. 지급명령과 법인등기가 바로 그것이다. 지급명령이란, 채무자에게 법적 절차에 따라 정식으로 금전 등을 청구하는 것으로 신청서를 법원에 제출하면 법원이 검토한 후 돈을 지급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제도다. 보통 법원의 지급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돈을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최근 들어 이를 이용하는 채권자들도 늘고 있다. 하지만 신청서 작성과 절차가 복잡해 개인이 진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일반인들은 법률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지만 적지 않은 비용 부담 때문에 이 역시 쉽지 않다. 지난해 8월 선보인 ‘지급명령 헬프미’는 지급명령에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으로, 전문 변호사들이 직접 만든 간단한 질문에 이용자가 답변만 하면 지급명령 신청서를 완성해 신청까지 대행해 준다. 지급명령 서비스 가격은 16만9,000원(일반 상담), 19만9,000원(변호사 전문 상담)에 책정돼 있다. 시장가가 100만원 내외인 것과 비교하면 획기적으로 비용을 줄인 것이다.

지난해 10월말 선보인 ‘법인등기 헬프미’는 법인설립 또는 대표자 변경, 이사 취임, 유상증자 등 법인의 구성에 변동이 새길 때 법인등기부등본에 해당 사실을 반영하는 절차다. 법인 운영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절차가 복잡하고 이슈 별로 기한이나 조건 등이 상이해 어려움을 겪는 법인 고객이 적지 않다. 법인등기 기본 등기는 12만9,000원이고 설립 등기 등 특수 등기 업무는 29만9,000원이다. 시장가는 각각 20만원과 50만원이다.

현재는 상담부터 신청서 접수 등 전 과정에서 상담원의 고객 응대와 수작업이 일부 들어가지만 조만간 100% 자동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비즈니스 모델이 구체화된 지 얼마 안 된 만큼 아직까지는 의미 있는 매출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매달 평균 10% 이상씩 성장하고 있다. 박 대표는 6개월 이내 월 매출 1억원 달성이 현재의 단기 목표라고 했다. 이후 상표 출원, 한정 상속, 협의 이혼, 개명 신청 등 법률 서비스를 다양화하면 성장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확신하고 있다.

대형 로펌의 잘 나가는 변호사를 그만 두고 창업 전선에 뛰어든 박효연 대표, 그녀에게 창업 후배들에게 조언 한 마디를 부탁했다.

“저는 아직 성공한 건 아니죠. 이제 시작이나 마찬가지니까요. 하지만 주변에 창업을 통해 성공한 분들을 보면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자신이 속해 있는 분야에서 창업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구요. ‘전(前) 직장이 최고의 배움터’라는 말도 있듯이 자신이 전문성을 갖고 있는 분야에서 창업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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